2009년 5월 14일 목요일

고려 인삼 재배의 시초

고려 인삼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전한의 원제(B.C. 48~33) 때 사유가 지은 「급취장」에서 인삼을 "삼" 이라고 기록한 것을 볼 수 있으며, 후한(A.D. 196-220) 때 장중경이 저술한 [상한론]에서는 처음으로 인삼을 이용한 처방 기록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제 무제때 양나라 사람 도홍경이 지은 [신농본초경] 에서는 인삼의 산지, 품질을 비롯하여 그 약효와 응용, 야생 인삼의 자생지 등 인삼에 대한 유래 등이 기록되어 있어, 이미 이 시기에는 인삼의 약효를 인정받아 사용되어 왔음을 확인할 수 있다.

삼국시대부터 고려인삼은 공물 또는 왕실의 재정확보를 위해 사용되었고, 특히 고려시대부터는 국가의 중요한 무역품으로 취급 되었다. 또한 조선시대에 들어서는 인공재배와 홍삼가공 기술이 발전함에 따라 국가 재정에서 인삼 교역이 차지하는 비중은 커져갔다. 이처럼 다양한 용도의 인삼은 17세기 후반 일본과 조선 그리고 중국을 잇는 동아시아 삼국교역의 핵심으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였다. 조선의 고려인삼을 매개로 일본의 은과 중국의 비단이 교류 하였다.
고려 말부터 인삼 교역량 증가와 민간의 공납부담증가로 인한 무분별한 채굴로 남획이 심해지면서 산삼이 희귀해지게 되었다. 따라서 일부 사람들은 산삼의 종자나 묘삼을 비밀리에 깊은 산속에 심어 인공재배하는 산양삼 재배법을 실시했는데 이것이 인삼재배의 시초라고 추정된다고 한다.


(사진은 국립공원 설악산 입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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